장보 (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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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보는 신나라 말 한나라 부흥 운동 시기에 세력을 일으킨 인물이다. 불기현을 근거지로 삼아 낭야군을 장악하고 오위장군을 자칭했다. 현한의 경시제와 대립하고, 양왕 유영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확장했다. 후한 광무제에게 귀순했다가 유영에게 다시 귀속되는 등 변절을 거듭했으며, 결국 광무제에게 항복하여 안구후에 봉해졌다. 이후 반란을 꾀하다 낭야태수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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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 (문공)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장보 |
원어 이름 | 張步 |
자 | 문공(文公) |
출생지 | 서주 낭야군 불기현(不其縣) (지금의 산동성 청도시 성양구) |
사망일 | 건무 8년(32년) 8월 |
형제자매 | 동생 장홍(張弘), 장람(張藍), 장수(張壽) |
관직 | |
관직 (자칭) | 오위장군(五威將軍) |
관직 (유영) |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 |
작위 | |
작위 (유영) | 유영의 한나라의 제왕 |
재위 (유영) | 27년 ~ 29년 |
군주 (유영) | 유영 → 유우 |
작위 (후한) | 후한의 안구후 |
재위 (후한) | 29년 ~ 32년 |
군주 (후한) | 후한 광무제 |
소속 | |
왕조 | 신나라 → 현한 → 유영의 한나라 → 후한 |
주군 | (독자 세력) → 유영 → 유우 → 광무제 |
2. 생애
신나라 말 한나라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장보는 수천 명을 모아 불기현(현대의 칭다오) 주변 현들을 공략하고 오위장군(五威將軍)을 자칭하며 낭야군에 웅거했다. 현한의 한 경시제가 왕굉을 낭야태수로 파견했으나 장보는 맞서 싸워 이겼다.
이후 장보는 유영과 후한 광무제 사이에서 복잡한 행보를 보인다. 유영이 경시제에게서 자립하며 장보를 회유하려 하자, 장보는 유영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도 광무제에게 투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유영의 편에 서서 광무제와 대립하게 된다.
광무제는 당시 다른 지역에서 전쟁 중이었기에, 장보는 제나라 12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영이 전사하고, 장보는 유우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결국 후한의 경감에게 패배했다. 광무제가 항복을 권유하자, 장보는 소무를 죽이고 투항하여 목숨을 건졌다.
광무제에게 용서받아 안구후(安丘侯)에 봉해졌으나,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려다 낭야태수 진준에게 살해됐다.
장보의 동생으로는 장홍(張弘), 장람(張藍), 장수(張徇)가 있었다.
2. 1. 세력 형성
신나라 말 한나라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장보는 수천 명을 모아 불기현(현대의 칭다오) 주변 현들을 공략하고 오위장군(五威將軍)을 자칭하며 낭야군에 웅거했다.[1][2]현한의 한 경시제가 왕굉(王閎)을 낭야태수로 파견했으나 장보는 맞서 싸워 이겼다. 한편, 현한의 양왕 유영이 경시제에게서 자립하면서 장보의 강병을 탐내 조서를 꾸며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충절후(忠節侯)로 삼고 서주와 청주 두 주를 감독하게 했다. 장보는 이를 받아들이고 청주의 북해군 극현(현대의 수광시)에 자리 잡았다. 동생 장홍(張弘)은 위장군(衛將軍), 장람(張藍)은 현무대장군(玄武大將軍), 장순(張徇)은 고밀태수로 삼았으며, 장수들을 파견해 태산·동래·성양·교동·북해·제남·제군 등을 공략했다.[4] 장보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왕굉은 직접 장보를 찾아가 설득하려 했으나, 대치 끝에 장보가 왕굉을 거꾸로 감동시켜 왕굉은 상빈의 예로 대우받고 군의 통치를 위임받아 사실상 그의 막빈이 되었다.[3]
2. 2. 유영과의 관계
유영은 경시제에게서 자립하면서 장보의 세력을 탐내 조서를 꾸며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충절후(忠節侯)로 삼고 서주와 청주 두 주를 감독하게 했다.[4] 장보는 이를 받아들이고 청주의 북해군 극현(현 수광시)에 자리 잡았다.[1]장보는 자신의 형제들을 요직에 앉혔다.
직책 | 이름 |
---|---|
위장군(衛將軍) | 장홍(張弘) |
현무대장군(玄武大將軍) | 장람(張藍) |
고밀태수 | 장순(張徇) |
장보는 장수들을 파견해 태산, 동래, 성양, 교동, 북해, 제남, 제군 등을 공략했다. 장보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경시제가 보낸 낭야태수 왕굉(王閎)은 직접 장보를 찾아가 설득하려 했으나, 대치 끝에 장보가 왕굉을 감동시켜 왕굉은 장보에게 상빈의 예로 대우받고 군의 통치를 위임받아 사실상 그의 막빈(幕賓)이 되었다.[3][4]
2. 3. 광무제와의 대립 및 투항
현한의 유영이 한 경시제에게서 자립하면서, 장보는 조서를 꾸며 받아들여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충절후(忠節侯)로 임명되고 서주와 청주 두 주를 감독하게 되었다. 청주의 북해군 극현에 자리잡고 동생들을 요직에 앉혔으며, 장수들을 파견해 여러 군을 공략했다.[14]건무 2년(26년), 후한 광무제가 보낸 복륭을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속했다. 건무 3년(27년) 봄, 광무제가 복륭을 다시 보내 동래태수로 임명했는데, 유영이 자신을 제왕으로 봉한다 하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복륭이 전한 고제의 원칙을 내세워 회유했지만, 장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복륭을 잡아 가두고 유영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결국은 복륭을 죽였다.[14] 또 광무제에게 반기를 든 팽총과도 동맹을 맺었다.[15]
광무제는 당시 다른 지역에서 전쟁 중이었기에, 장보는 제나라 12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영이 전사하고 양나라가 평정되자, 장보는 유영의 아들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정한공(定漢公)으로서 백관을 설치하고자 했는데, 왕굉이 반대해 무산되었다.
건무 5년(29년) 음력 2월, 후한의 경감 등이 공격해 오자, 부장 비읍(費邑)을 제남왕으로 삼고 역하(제남군 역성현)에 주둔하게 했다. 그러나 음력 8월에는 유우가 패망했고, 음력 10월, 광무제가 제나라 근처인 노나라에 행차했고, 비읍은 경감에게 격파돼 전사했다. 경감이 임치로 진격하자, 장보는 경감의 군대를 얕보고 대군을 들어 공격했으나 대패해 극현으로 달아났다. 광무제가 극현으로 진군하자 극현을 버리고 평수로 또 달아났다.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 장보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장보는 소무를 죽이고 그 머리를 바쳐 투항했다. 광무제는 장보를 용서하고 안구후(安丘侯)에 봉했으며, 가솔들과 함께 낙양에 이주시켰다.
건무 8년(32년) 여름 음력 8월, 장보는 처자와 함께 임회로 달아나, 동생 장홍과 장람과 함께 무리를 모아 배를 띄워 고향 낭야로 돌아가려 했는데, 진준의 추격을 받아 살해됐다.
2. 4. 최후
후한 광무제에게 반기를 든 팽총과 동맹을 맺고, 현한의 한 경시제에게서 자립한 유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복륭을 죽였다.[14][15]광무제는 당시 북으로는 연나라 지방, 남으로는 양나라와 초나라 지방에서 전쟁하고 있었기에, 장보는 제나라 12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영이 전사하고 양나라가 평정되자, 장보는 유영의 아들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정한공(定漢公)으로서 백관을 설치하고자 했는데, 왕굉이 반대해 무산되었다.
건무 5년(29년) 2월, 후한의 건위대장군 경감 등이 광무제의 명으로 장보를 치러 오자, 부장 비읍(費邑)을 제남왕으로 삼고 역하(제남군 역성현)에 주둔하게 했다. 그러나 8월에는 유우가 패망했고, 10월, 광무제가 제나라 근처인 노나라에 행차했으며, 비읍은 경감에게 격파돼 전사했다. 경감이 임치로 진격하자, 경감의 군대는 원정 왔고 수가 적으므로 얕보고 대군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대패해 극현으로 달아났다. 광무제가 극현으로 진군하자 극현을 버리고 평수로 달아났다. 마침 유영의 부장이었던 소무가 구원군을 거느리고 와서는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경감을 얕본 것을 질책하자 부끄러워했다.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 소무와 장보에게 서로 베고 투항하면 열후에 봉해주겠다고 하자, 먼저 소무를 죽이고 그 머리를 바쳐 투항했다. 옥에 갇힌 세 동생과 함께 광무제에게 용서받아 안구후(安丘侯)에 봉해졌고, 가솔들과 함께 낙양으로 이주했다.
건무 8년(32년) 여름 8월, 처자와 함께 임회로 달아나, 동생 장홍과 장람과 함께 무리를 모아 배를 띄워 고향 낭야로 돌아가려 했는데, 낭야태수 진준의 추격을 받아 살해됐다.[1]
참조
[1]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o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https://books.google[...]
Brill
2022-02-12
[2]
간행물
Bielenstein, p. 29.
[3]
간행물
Bielenstein, p. 58.
[4]
간행물
Bielenstein, p. 59.
[5]
간행물
Bielenstein, pp. 135–36.
[6]
간행물
Bielenstein, p. 137.
[7]
간행물
Bielenstein, p. 127.
[8]
간행물
Bielenstein, p. 138.
[9]
간행물
Bielenstein, pp. 139–40.
[10]
간행물
Bielenstein, pp. 143–44.
[11]
간행물
Bielenstein, pp. 147–49.
[12]
간행물
Bielenstein, p. 149.
[13]
문서
ただし、更始政権滅亡前後には劉永もすでに天子を称しており、本来は劉紆がそれを後継するのは当然のはずである。王閎は、劉紆には劉永ほどの人望はなく求心力が望めないと判断したのであろう。
[14]
서적
범엽: 《후한서》 권26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16 중 복담
[15]
서적
범엽: 《후한서》 권12 왕유장이팽노열전제2 중 팽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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